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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재성 박사] 아담 안에서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재인식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8-09-19 조회수 877

아담 안에서 사망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재인식

 

김재성 박사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부총장)

 

지금 시급히 한국교회가 이 시대의 과제를 끌어안고서 해결에 나서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기도해야할 절실한 제목은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무너진 도덕과 혼돈에 빠진 가치관을 바로 세워나가고, 진리와 지침을 제공하는 일이다. 매스컴에 화제가 된다거나, 겉으로 보여주는 대형행사와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의 윤리회복 운동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기독교가 제공해야할 진리와 생명은 세를 과시하는 듯한 대형 행사나 거대한 집회가 아니다. “엑스폴로 75”와 같은 행사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제발 그렇게 관행처럼 굳어져온 일련의 기독교 연합 단체들의 소모적인 모임은 과감하게 폐지하기를 제안한다. 마틴 루터가 내던지라고 외쳤던 “면죄부”와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은 더 이상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공허하게 바람이나 일으키고 그칠 일들은 이제 더 이상은 없어져야만 한다.

 

1. 윤리상실과 열매부재

지금 전 세계적으로 “Me Too" (“나도 역시”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는 고발의 물결이 연일 언론 보도를 통해서 확산되어가고 있다. 지난 날, 비윤리적인 열매와 부도덕한 행태들이 이제 와서야 낱낱이 고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2018년도에 들어서서, 보다 민주화된 분위기에서 여성들의 인권존중 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크나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정치, 교육, 예술과 창작분야 전반에서 권력을 쟁탈한 자들의 횡포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다. 음악, 문학, 연극, 영화, 교육 등 각 분야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양상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쾌락지상주의가 은밀하게 어두운 세력을 확산시켰음이 드러나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한국 기독교는 일반 성도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 한국사회는 1990년대 이후로, 갑작스러운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인식구조가 바뀌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갈등구조에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의 의식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초고령화 하는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인구절벽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몰려오고 말았다. 치열한 입시경쟁에 이어지는 취업전쟁 속에서 출산율 감소, 결혼지연, 대량 실업자 문제가 갖가지 사회적 갈등 구조를 양산하고 있다.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급격히 감소했는데, 그것이 사라질 것이라는 대비책도 없었다. 베이비 붐 세대의 급속한 고령화로 대책없이 물러나는 장년층과 노년층이 교회의 주류인데도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대도시, 대형교회들만 살아남았는데도, 그러한 처지와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오히려 한국교회의 침몰을 자초하는 폐해를 양산하고 있다. 일부 지도자들이지만 세상적으로 알려진 대형교회의 각종 스캔들과 성추문, 목회자의 세습, 권위적인 개척설립자의 목회행태, 재정집행의 불투명성, 등등 날개없이 추락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열매 없는 나무를 꾸짖으신 예수님의 경계를 기억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7장 16절에 기록된 가르침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에서 핵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향한 질타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양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늑대와 여우처럼 속이는 자들인 것이다. 가짜 복음을 전하는 거짓 목자는 양떼를 미혹에 빠뜨려서 망하게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으로부터 오백년이 흘러왔다. 개혁신학으로 근간을 삼아서 교회를 조직하고 예배를 드리며 섬겨온 지난 오백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는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 7:17). 좋은 열매의 요람으로서, 참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종교 개혁자들이 잘 보여주었다.

세속화와 극도의 개인주의, 물질적인 쾌락주의가 범람한 가운데 교회마저도 분열과 경쟁에 내몰리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쓸모없다고 저주하셨다 (마 21:18-18). 겉으로는 화려하게 정통처럼 포장하고, 속에는 아무런 결실이 없다면, 대형 교단도, 큰 교회도 역시 로마 바티칸처럼 공허한 장소가 되고 말 것이다. 루터는 도둑들의 소굴이라고 비판했었다.

시절마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물가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시 1, 23편). 복음에 신실하고 미래의 전진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훈과 유산을 되살려야 한다. 오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만족과 오만에 빠진 자들을 평가할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이요, 진리이며, 길이다.

다른 종교와 철학과 교과서에서는 결코 순수한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은 반드시 그 구성원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서 영적인 결과와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져 있다. 어떤 종교든지, 지금 나타나는 적나라한 현상들과 구조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지닌 궁극적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진리를 해체하였고, 종교다원주의에서는 기독교를 밀어내려 했지만, 인간세계에는 그저 더럽고 추한 부도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내신 인류구속의 사역들과 가르침들만이 참된 진리이며, 그것을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에서 열매로 보여주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서 한점 부끄러움을 발견할 수 없고, 그토록 고상한 진리와 참된 가치를 전달받아서 성장해온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떠한가? 윤리가 상실되었고 아름다운 열매는 사라지고 말았으며, 보다 본질적으로 그 내면에 담긴 신학적 사상과 판단력도 혼돈에 묻혀있다.

 

2. 아담 V 예수 그리스도

 

지금 전 세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윤리적, 도덕적 참상의 실재는 아담과 이브에게서 시작되었고, 계승되고 있으며, 인류역사의 적나라한 실재가 되었다.

 

2.1. 아담 안에서 죽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되었으며, 원래 생육하고 번영하면서 우주 안에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임무를 부여받았음을 기억해야 한다(창 1:28).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자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란 이 땅 위에 있는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임무와 밀접하게 연관성을 맺고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었기에, 그가 수행할 최고의 임무로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져 있었다. 아담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과 매우 유사하다.

인간 세계의 도덕적 질서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서 유기적 관련성을 맺고 있다. 지상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모든 노력들은 시간적으로 무한정하다거나, 무작정 제멋대로 수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두 번 째 명령을 내렸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다 (창 2:16-17). 여기에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 엘로힘”인데, 하나님이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사용하셨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책임을 어기고, 불순종하였다.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간본성에는 타락하고 오염되며 부패한 원죄가 전가되어졌다. 에덴에서 명령하신 것과 같이, 모세 오경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두 85회나 반복되어진다. 아담은 타락 후에 930년을 살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창 5:5).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임재와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과 파멸을 자초했다. 아담의 모든 행위들은 놀라운 종말론적인 의미와 구원론적인 목표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아담의 순종은 그가 대표하는 모든 후손들에게까지도 주어질 종말적인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과 실패가 초래한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었다 (고전 15:22, 롬 5:14)

 

2.2.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아담과는 정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생애 기간 동안에 모든 율법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고, 온전히 아담의 실수를 회복했다. 신약복음서는 인류의 구원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전 생애와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시는 모습을 자세히 다루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중요하지만, 복음서는 마지막 예수님의 사역에만 집중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전 생애를 통해서 이뤄진 일들이다.

로마서 5장 12-21절에 보면, 아담으로 인해서 죄가 들어와서, 아담 자신만이 아니라 결국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왔음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와 대조를 시키고 있다.

죤 머레이 교수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간과 후손들의 것으로 간주되어졌다는 전가의 내용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다.

1)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죽음과의 긴밀한 결합 (롬 5:12,15,17)

2)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정죄와의 밀접한 결합 (롬 5:16,18)

3) 아담의 죄와 모든 사람의 죄가 긴밀히 결합 (롬 5:12,19)

4)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본질 대조 (롬 5장 전체)

로마서 5장의 설명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속죄를 풀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모두 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약의 성취로 제시되는 구원의 객관적 준비와 각 사람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주관적 수용이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통해서 의가 완전히 실현되어서 영생과 생명이 왔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두 갈림길에서 아담의 길로 따라가는 데서 빚어진다. 어서 빨리, 아담의 길에서 돌이켜서 더 늦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만 한다.

로마서 1:18-2:16절에 보면,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요구하였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신성과 정의의 요구를 드러내셨다 (롬 1:19). 창세기 2:16-17절에, 순종의 요구는 명백한 기준으로 제시되어졌다.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코 죽으리라”

하나님의 법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롬 2:6). 이것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육체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완전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시대에 법을 어긴 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그래서 율법을 단순히 듣는 자기 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라가 되라고 권고하신다(롬 2:13).

“저는 율법을 들은 적이 없나이다”라고 그 어떤 사람도 핑계하지 못하도록 양심에다가 새겨놓았다 (롬 2:15). 모든 인류는 동일한 한 가지 법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양심에 새겨진 법은 그 누구도 잊지 말아야할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도덕적인 율법의 특성을 분명하게 제정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율법 중에서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하거나, 버리는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가 될 것이고,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큰 자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19). 율법은 반드시 사람에 의해서 성취되어지고, 완성되며, 이뤄져야 한다. 물론, 예수님만이 이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자칭 의롭다하는 율법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묻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반문했다. 레위기 19:18, 신명기 6:5절에 나온 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눅 10:28).

 

2.3. 의를 행하는 자가 되라

바울 사도는 로마서 10장 5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하였다. 야고보서 1장 22-27절에서도, 율법을 그저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바울 사도는 구약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를 인용하고,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행동한다”(doing)는 헬라어는 “poiesai"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갖도록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그의 법을 따라서 완벽하게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요구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죄에 대한 징벌까지도 하나닙의 법을 성취하는 긍정적인 실행이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3:10절에서도,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4. 의를 이루고자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행할 사명으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 5:19). 다른 곳에서는, 세례 요한에게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고 가르쳤다 (마 3:15). 의는 그가 수행해야 할 사명이었다. 제자들이 배가고파서 힘들어 할 때에도,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고 선포하였다 (요 4:34). 예수님은 그냥 혼자서 일방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실체 모든 분야에서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였다.

 

2.5. 구세주, 임마누엘로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날, 모든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 초능력자, 해결사로 오신 것이 아니다. 도리어 갖난 아이로 낮은 자들 가운데서 출생하였고, “율법 아래 낳으신 분”으로 오셔서, “초등학문” (stoixeia) 아래서 “종노릇 하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구해주셨다 (갈 4:3-5).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낮고 천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인간의 모든 단계에서 율법의 요구를 을 완전히 성취하고자 함이었다 (요 6:38-40, 17:3-6).

 

3.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첫 사람 아담과 대조되는 가장 중요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의 특징은 철저한 순종이다. 첫 아담이 에덴에서 수행해야만 했었던 순종은 마지막 아담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고전 15:45).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 (롬 5:19).

 

3.1. 대속적 순종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 특징이 인류를 “대리하는 순종”을 (vicarious obedience) 하신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 오신 분으로 죄가 없는 분이시며, 대리자로서 순종을 감당하려는 것이 그리스도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은 중보자로서 스스로 결단하여 시행된 일이다 (요 10:17-18).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창세기 2장 17절에, 죄에 대한 보응은 죽음이라고 선언되었으며,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따라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인과 같이 되셨다 (고후 5:21).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함축하는 바는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처럼 취급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들의 죄악이 그분에게 전가되어졌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전 15:3).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5번과 16번에서 낮아지셔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을 요약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들의 빚을 갚아주셔야만 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들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빚이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고자 그리스도는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방법으로 죽음의 형벌을 감당하였다. 돌트 신경 2장 3항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에 대한 가장 완벽하고도 유일한 희생이며 만족이요, 무한대한 가치와 존귀함이 있으며, 모든 세상의 죄악들을 대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다”고 고백하였다.

“죽기까지 순종하심”은 엄청난 사태가 닥쳐옴을 의미한다.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 사망이 다스리는 곳에서 삼일동안이나 그리스도께서 남겨진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가장 깊은 처절함과 비통함과 치욕을 당하시고자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신 것이다. 죽음과 지옥의 모욕, 수난의 가장 비참함을 다 경험하시고, 부활과 승천으로 승리하신 구세주가 되셨다 (벧전 3:19,22).

 

3.2.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이것은 종교개혁시대 이후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전생애 동안에 모든 율법을 지켜낸 것은 "능동적 순종"(active obedience)이라고 해석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애가 마지막에 이르게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최종적인 복종은 “수동적 순종” (passive obedience)라고 풀이했다. 라틴어에서 “patior‘ (’고난을 당하다’)라는 동사에서 빚어진 형용사를 앞에다가 차용했다. “수동적 순종”은 억지로 하기 싫은 것을 끌려가서 순종한다는 뜻이 아니라, “고낭당하는” 순종이라는 내용을 표현한 단어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은 의롭다고 선포되어진다. 주님의 순종이 하나님의 모든 법을 지키는 최종적인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기준을 모두 다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용어들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이사야서 53장에 고난당하는 종을 근거로 하여, 머레이 교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은 능동적 순종이고, 고난당하신 것은 수동적 순종이라고 재규정했다. 두 가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것이고, 죄에 맞서서 거룩하게 되도록 노력한 것이다. 머레이 교수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순종은 고난을 통해서 점진성(progressiveness)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입증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히 5:8). 어린 시절부터 점차 성장해 가면서 완전하게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성인의 순종을 보여줬다 (빌 2:8). 예수님은 점차 아버지의 사랑 가운데서 성장했다 (눅 2:52).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보다 더 강조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순종은 추상적으로나 혹은 기술상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된다. 완전한 인격체의

모든 자원들이 총동원되어지는 것이 순종이다. 그의 인격 속에 순종이 자리한다.

순종은 그분의 완전한 구현이다. ... 우리는 그 순종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분과의 연합을 통해서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이것은 구원론의 중심 진리가

그리스도와의 교통과 연합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확증하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이 믿음의 성도들에게 전가되어져서 칭의를 얻는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능동적 의로움”(active righteousness)과 “수동적 의로움”(passive righteousness)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먼저 “수동적 의로움”이란 믿음으로 성도를 의롭다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인데, 외부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안목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인하여 무조건적으로 죄의 용서를 통해서 수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수동적 의로움에서 능동적 의로움이 주어지는데, 인간들과 피조물을 돌보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순종함과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시키는 댜양한 행위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의로움을 의미한다. 루터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에게 의를 전가한다”고 포괄적으로 가르쳤다. 칼빈은 루터의 칭의교리에 공감하면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근거는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이라고 강조했다.

초기 정통신학자들 중에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60번 문항과 그들의 여러 저술에서도 능동적 순종의 전가교리가 담겨있다. 요한 볼레비아누스와 아만두스 폴라누스도 역시 능동적 순종의 전가 교리를 가르쳤다. 일부 개혁신학자들 (Remonstrants, Amyraldians, Socinians)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다면, 그의 죽으심은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하여서, 완전한 순종의 교리를 거부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장 3항과 대교리문답서 70번 문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점을 강조했다, 청교도들과 대륙의 개혁파에서도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의로움에 의해서 성도들에게 칭의가 주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후에도, 존 오웬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만이 우리의 위로의 근거임을 역설하였다. 보에티우스 (1589-1676)는 그리스도의 순종사역은 자발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순종하였다고 강조했다. 「사보이 신앙고백서」에서는 보다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의 근거임을 선언했다.

 

3.3. 순종은 그리스도의 핵심적인 구속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죄의 사면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를 가져다 주는 칭의론의 핵심교리가 담겨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전가되어졌음을 고백한다. 죤 머레이 (1898-1975)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다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이야말로 그저 하나의 성경적 교리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집약하는 “큰 구조” (a category)라고 주장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순종의 사역이라고 보았고, 그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그 순종이 지적하고자하는 개념은 전체적으로 광범위하게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전체를 통괄하는 원리임을 충분히 입증하도록 너무나 자주 언급되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모두 다 자발적이며, 능동적이다. 그가 순종하고자 할 때에, 심각한 고난을 당하셨다.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해서 연구한 신약학자 롱네커는 “순종” (úpakoe)과 “순종적인” (úpekoos)라는 헬라어 단어와 용례를 추적했다. 그는 이런 단어들은 믿음을 이해하게 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뒷받침하였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품으라고 촉구하였는데, 윌리엄 베랜드는 “능동적인 순종”으로 풀이한다. 예수님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순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로서 맡겨진 사역과 직분을 수행하신 것이다 (딤전 2:5). 히브리서 9:15과 12:4에서는 “새언약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신약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애 동안에 모든 율법을 준수하고 완벽하게 성취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였음을 기술했다. 바울 사도는 반복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순종하셨다고 강조했다 (고후 5:21). 그리스도는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주셨고 (딛 2:14),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엡 5:2, 살전 5:10).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다 (갈 3:13).

4. 지식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다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의 율법과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고 한다면,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신자의 생활원리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해야만 한다. 그동안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면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하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의 범위와 내용이 극히 제한적이다. 기독교인들도 역시 시대의 영향 속에서 자라났기에,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자기중심적이 되었고,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기 쉽다. 또한 자신의 주장만을 정당화하려하고, 심지어 신학적인 안목과 전통마저도 자기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용하려는 경우가 너무나 많고, 때로는 자신의 잘못도 변명하려고 악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실천과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뜻과 법도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지식”이라야만 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분의 말씀과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결국 그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

신학과 순종에 관한 중요한 교훈들에 대해서는 존 프레임 박사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한 교리」에서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의 통치, 권위, 임재에 대해서 종합적인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에 그치는 인식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의 권위를 존중하고, 피조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4.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순종을 창출한다. (The knowledge of God produces obedience.)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26).

기독신자는 지식만으로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간다. 여기에는 모두 여덟 가지가 제시되어져 있는데, 그 정점은 역시 사랑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을 더하라” (벧후 1:3, 5)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그 지식으로 분별력을 갖게 되어서, 세상의 더러움에서 돌아선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벧후 2:20)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요 14:15, 21). 그것이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참된 신자는 감당하고자 나아간다. 이처럼 위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엄청난 축복을 확증해 주시면서, 동시에 이와 함께, 단계적으로 거쳐야할 인내, 고난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또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될수록,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이런 관계는 피할 수 없는 성화의 경험이다. 하나님 영광의 성경적 모습이 하나님 백성에게 옮겨지고, 하나님 영광의 성경적 모습이 하나님 백성에 임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는 하나님 백성의 성경적 모습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4.2. 순종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Obeidence leads to knowledge of God)

행동의 원리들을 파악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7:17-20; 참조할 성경들, 엡 3:17-19; 딤후 2:25; 요일 3:16; 시 111:10; 잠 1;7; 15:33; 사 33:6).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태도와 함께 불가피 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바람(desire)을 동반하는 존경과 경외를 가진 그런 기본적 태도이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제 1항목과는 정반대의 요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에서 지식과 순종 사이에 ‘순환적(circle)’ 관계가 존재한다. 이 둘 가운데 어떤 것도 일시적으로나 인과적으로 다른 것에 앞서지 않는다. 지식과 순종은 분리할 수 없고 동시적이다. 각각은 서로를 풍성하게 한다(참조. 벧후 1:5f). 일부 개혁주의 ‘주지주의자들(intellectualists)’, 예를 들면 미국 장로교회 철학자 고든 클락 박사는 이 명칭을 자신에게 적용했는데, 이런 순환성(circularity)을 공정하게 다루지 못했다.

메이첸(J. Gresham Machen) 박사는 “삶은 교리 위에 세워 진다.” 역시 “교리는 삶 위에 세워진다”는 강조를 남겼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에게 더 완전하게 순종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분에게 더 완전하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강조점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은혜가 지식을 창출 한다는 요점과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초로 지식과 순종을 우리에게 동시에 주신다. 일단 지식과 순종이 주어지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점점 더 큰 완전함으로 지식과 순종을 제공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단을 사용하신다. 다른 말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을 주시는 수단으로써 우리의 순종을 사용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주시는 수단으로써 우리의 지식을 사용하신다.

 

4.3. 순종과 지식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Two words are synonyms).

성경에서 매우 자주 순종과 지식을 서로 동격으로 놓고 있다. 순종과 지식 사이에 상호 교차적인 순환성은 훨씬 더 확장되어져 있고, 확대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지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원하고 더 많은 은혜로 이어진다(출 33:13). 또한 더 많은 은혜는 더 많은 지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은총과 호의를 베풀어주시기에 ‘일방적(unilateral)’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갖고 있는 지식을 창출해 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람의 지식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를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창출할 수는 없다. 호세아 6:5-6을 보면, 아담의 경우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결국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마저도 없어져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순종과 지식, 각기 서로를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쓰여지고 있다 (예., 렘 22:16). 또한 가끔 지식은 뚜렷한 윤리적 범주의 일반 목록 안에 있는 용어로써 표현되기도 한다(예., 호 4:1f). 따라서 지식은 일종의 순종으로 제시된다(참조. 렘 31:31f.; 요 8:55 (문맥 특별히 19, 32, 41에 주목하라). 고전 2:6,13-15에 보면, 이 세상에서 “온전한(mature)” 지혜라고 하는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통치자들의 지혜나 권세가 아니라, 윤리적-종교적 특성을 갖고 있음이 강조되어져 있다 (참조, 엡 4:13; 빌 3:8-11; 살후 1:8 이하; 벧후 1:5; 2:20 이하).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순종은 단지 지식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지식을 이루는 구성적 요소가 된다. 순종이 없으면, 그 어떤 지식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지식이 없이는 그 어떤 순종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운닝의 저서, 『기독교는 계시를 가지고 있는가?」에 보면, 실제로 지식이 담고 있는 개념적 의미가 왜곡되어져 있다. 그는 계시된 신지식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순종과 동일시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가 제시한 유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단순히 학식을 증가시키라는 의미로서의 ‘지식’을 반대한 부분이다. 그는 우리가 가진 전통적 지식에의 숭배와 싸우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한 지적을 했다.

순종과 지식은 분명히 다른 용어이다. 무작정 모든 성경본문에서 서로 바꿔버릴 수는 없다. 모든 문맥과 단락에서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동의어는 아니다. 두 단어는 분명히 다르다. 지식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 간에 존재하는 차별성과 구별성을 아는 것이고, 순종은 그 관계 안에서 우리 인간의 행동과 활동을 지정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여서 종종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다.

 

4.4. 순종은 지식의 기준이다. (Obedience is the criteria of knowledge).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인가를 확인하려고 한다면, 간단하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지의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문제를 내서 필기시험을 보면 된다. 그러나 더 확실한 방법은 그의 생활을 조사해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규정하는 무신론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없다는 이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태도와 자세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란 우리 인간의 부패 가운데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시 10:4ff.; 14:1-7, 53). 기독교 신앙이나 지식을 가졌느냐의 여부를 검증하는 길은 거룩한 생활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마 7:21ff.; 눅 8:21; 요 8:47; 14:15, 21, 23f.; 15:7, 10, 14; 17:6, 17; 요일 2:3-5; 4:7; 5:2f.; 요이 6f.; 계 12:17; 14:12). 거룩한 삶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검증하는 궁극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인간이 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즉 우리가 그분에 대해 단지 이론으로 만들 수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의 생활 속에서 깊이 관여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Yahweh)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고 선언하셨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독립성과 자존성을 가리키는 구절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이 판별해 낼 수 없다. 일찍이 쉐퍼(Francis Schaeffer)가 해설하였듯이,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면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련성(involvement)은 실질적인 관계이다. 우리의 이론적 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의 관계이다. 불순종하는 것은 괘씸하게도 만물 가운데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관여하고 있음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따라서 불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과 무식함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지식이 있음을 표현하는 길이다.

 

4.5. 따라서 지식 자체를 순종으로 추구해야 함이 분명하다. (the Knowlege of God must be sought in an obedient way.)

성경에는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만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가에 대해서 지침을 주었다. 참지식과 거짓 지식의 차이점을 식별하는 계명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고린도전서 1:2; 3:18-23; 8:1-3, 야고보서 3:13-18절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순종으로 신지식을 추구할 때 우리는 기독교 지식은 권위 아래에 있는 지식임과 지식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자율적이 아닌 성경에 지배를 받아야 하는 근본적인 핵심을 가정한다. 또한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의 진리(또한 어느 정도 성경의 내용)를 우리가 가진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 지식이 다른 모든 지식을 위한 기준이 되고 다른 명제의 수용이나 거부를 지배한다면 이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어떤 명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우리가 다른 무엇을 아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는 그분을 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그분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해야 한다. 이것은 난점이다. 왜냐하면 결국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류가 있으며 또한 때때로 교정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교정은 어떤 다른 종류의 지식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단지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기초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맺는 말

 

인간의 본성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높은 지위와 권세, 육체적 쾌락과 물질적인 성공만이 최종 목표가 된다. 그러한 세속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한국교회도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길을 따라가게 될 때에는 최종 승리와 종말론적인 희망이 있다.

아담의 불순종을 따라가는 길은 패망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 살려는 성도에게는 영생과 생명과 기쁨이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희생과 순종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고 허황된 것이라 비판하며 거부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다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순종은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도록 성령의 선물로 믿음을 얻게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확고하게 간직하면서, 순종과 복종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2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가 취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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