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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태영교수] “온신학과 개혁교리”
글쓴이 관리자 작성일 2018-09-19 조회수 930

“온신학과 개혁교리”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서론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를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양적으로 정체 내지 쇠락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질적으로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후자의 결과요, 후자를 전자의 원인이라 말한다면, 결국 후자, 곧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 단 하나의 문제인 셈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신학의 문제이고 또 교리의 문제로 진단한다. 교회를 이해하는 신학이 바람직하지 못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가 바르지 못하다는 뜻이다. 교회가 바른 신학, 바른 교리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앞으로 교회로서의 역할을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신학과 교리는 크게 보면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세히 구별한다면 신학은 정신 또는 원리의 측면이 강한데 비하여 교리는 그 신학에 따른 구체적 진술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는 바른 신학은 온신학과 관련하여, 바른 교리는 교회개혁자들의 주요 가르침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I. 온신학이란?

필자는 한국의 바른 신학으로 온신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목회하는 모든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온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 주기를 요청한다. 특히 온신학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가능한 한 온신학의 정신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목회하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온신학(Ohn Theology)은 최근 김명용총장이 명명한 것으로써 2014년 10월 9일 온신학회가 창립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온신학의 ‘온’은 순수 한글로써 온전하다는 의미를 우선적으로 취하고 있다. 따라서 온신학은 온전한 신학이라는 의미가 된다. 지금까지의 한국신학에서 근본주의적 흐름, 민중신학적 흐름, 순복음주의적 흐름 등이 한국적 신학으로 자리매김되어 온 적이 있었는데, 온신학은 그런 흐름들을 존중하지만 온전한 신학으로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고, 온전성, 혹은 전체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온신학의 역사적 기원은 한국의 대표적 목회자로 존경받는 한경직목사의 목회신학, 한국조직신학계의 거봉으로 인정받는 이종성총장의 조직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흐름에서 김명용이 중심이 되어 함께 세워가고 있는 한국적 신학이 온신학이다. 이종성의 신학을 통전적신학으로 명명하는데, 온신학은 통전적신학을 상당부분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여기서 온신학의 구체적 내용보다는 그 정신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온신학의 신학정신임을 밝혀둔다. 필자는 그것을 5가지 한자어로 표현한다. 전,정,온,이,한(全,正,溫,易,韓)이 그것이다.

전(全)은 온전 혹은 전체를 의미한다. 온신학이 첫 번째로 내거는 기치라 할 수 있다. 전체성을 가지려면 보수와 진보,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근본주의, 순복음주의, 민중신학 등의 장점은 그대로 취하되, 부분으로 끝나지 않도록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좌와 우를 철폐하고 한데 묶어서 중(中)으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좌와 우를 그대로 보존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역동적으로 온전함을 이루기를 희망하는 신학이다.

정(正)은 올바른 신학을 의미한다. 너무나 당연한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신학이 항상 바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이단 사설들이 나타나 교회를 혼란시켜 온 것이 그 사실을 잘 말해 준다. 필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신학의 기준은 성경과 개신교 원리다. 온신학은 바른 신학으로서 성경적인 신학, 16세기 교회개혁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한다.

온(溫)은 따뜻한 신학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신학이라는 뜻이다. 생명은 따뜻한 온기를 필요로 한다. 차면 죽고 따뜻하면 산다는 말이 있다. 온신학은 영혼과 육체 곧 전인적인 생명신학, 개인과 공동체를 살리는 신학을 지향한다. 나아가 따뜻한 사랑의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을 지향한다. 요즘 신학은 너무 논쟁적이고 현학적이어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느끼기가 힘들다. 생명을 살리는 신학은 생명의 따뜻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이(易)는 쉬운 신학을 의미한다. 신학은 모든 신자들의 신학이어야 한다. 현대의 신학은 너무 학문적이라서 평범한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목회자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결과 신학이 교회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아탑에 갇힌 학문, 교회와 이질적인 학문이 되어서 교회와 신학교 사이의 거리를 점점 더 멀게 하고 있다. 온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을 추구함으로 평이성, 곧 쉬운 신학을 지향한다. 최고의 신학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쉬운 언어로 구사되었는가 하는 것이 온신학의 하나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한(韓)은 한국적 신학을 가리킨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신학이 단순히 서구신학을 수입하거나 모방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의 심성에 맞지 않아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온신학은 우리 한국인의 심성, 언어와 삶, 한국의 정신문화에서 우러나온 신학 곧 우리의 주체적 신학을 지향한다. 민중신학이 세계에 내놓는 한국적신학이 아니라 온신학이 한국적신학임을 벌써 세계 여러 곳에서 인정하고 있다. ‘온’이라는 순수 한국어는 이것이 한국적신학임을 암시하고 있다.

 

II. 개혁교리란?

바른 교리가 무엇일까? 그것은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교회개혁운동이 다름 아니라 바른 교리를 추구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500년 전에 재발견한 개혁자들의 그 바른 교리가 현대 개신교에서 너무 많이 잊혀졌다. 그것은 로마교회(천주교)와 다른 이단들 속에 있는 비진리가 은연 중에 교회 속으로 많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현대의 교회가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키고, 나아가 이단들의 교리적 공격에서 교회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최소한 개혁자들의 기본 가르침을 잘 회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개혁자들의 구호 속에서 발견된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고 ‘만인제사장’이 그것이다. 그 의미를 오늘날의 현상과 대비하여 살펴보자.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정경 66권 외에 다른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교리와 삶의 최고 권위로 삼는 것이다. 교회의 권위조차 성경의 권위 아래 있음을 실천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로마교회는 이 원칙을 철저히 위배하고 있다. 또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 외에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다른 경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원리강론이든, 몰몬경이든, 혹은 위대한 신학자의 명저라 할지라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할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직 은혜와 믿음(sola gratia / sola fide)은 교회개혁운동의 실질적 원리였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 뿐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인간의 공로를 완전히 배격한다.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펠라기우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로의 협력을 가르쳤던 준-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도 철저히 배격하였다. 교회개혁당시 로마교회는 이 원리에서 완전히 멀어져서 준-펠라기우스주의로 기울어져 있었고, 오늘날은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우리 개신교 교회에도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있으므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solus Christus)는 오늘날 소리 높혀 외쳐야 할 개혁의 원리다.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예수님만이 중보자이시다. 마리아라든지 소위 로마교회의 성인들은 결코 중보자가 아니며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아니다. 오늘날은 예수님 외에도 다른 그리스도가 있다는 식의 종교다원주의가 신학계를 휩쓸고 있을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급속히 전파되고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 가능성, 다른 그리스도를 허용한다면 자신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단 교주들의 행태를 반박할 근거가 다 무너질 것이다.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은 모든 신자가 다 제사장이므로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신분 내지 계급적 차이가 더 이상 없다는 교리다. 로마교회는 교황으로부터 신부에 이르는 소위 성직자만 제사장(사제)이고 평신도는 제사장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요 화목제물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심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셨다. 목회직은 양떼를 먹이고 친다는 점에서 회중과 직분상으로 구별되는 것이지 신분상 구분되는 자리가 아니다. 종종 언론에서 질타를 받고 있는 제왕적 목회자상은 개혁교리에 어긋나는 현상일 뿐이다.

 

III. 이단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태도

이단이란 바른 신학, 바른 교리를 배격하는 사상 및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교회를 교란시키는 이단사상을 발견하여 그 정체를 드러내고 축출함으로써 교회를 수호할 뿐 아니라 바른 신학과 교리를 형성해 왔다. 상당수의 정통교리는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단의 발생을 용인하시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교회사적으로 배격된 이단들의 유형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지금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신다는 주장.

2) 성경 외에도 다른 경전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

3) 삼위일체론에 대한 부정 및 양태론 또는 삼신론적인 해석.

4)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하여 균형을 상실한 해석.

5) 행위를 조건으로 하는 구원설 또는 예수님 외에도 구원의 다른 길이 있다는 주장.

6) 기타 시한부재림설이나 예수님 이외의 재림주에 대한 주장 등.

교회사적으로 이단에 대하여 잘 대처해 왔고 앞으로도 잘 대처해야 하지만, 이단을 정죄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과오도 적지 않았다. 16세기 로마교회가 개혁자들에 대해서 취한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교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과도한 이단 정죄는 삼가야 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이단 정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입장을 보여준다. 하나는 바울의 단호한 입장이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는 이단에 대한 맹렬한 저주를 선포하였다. 거기에 등장하는 이단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명백한 이단이었다. 반면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의 가라지 비유에서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제시하셨다.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실수하여 알곡까지 뽑아내는 과오를 염려하신 것이다. 이 둘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원칙이 발견된다. 가라지, 곧 이단인지 아닌지 명백하지 않을 때는 뽑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행위구원과 같은 명백한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처리해야 한다. 다만 그 경우에도 용서와 사랑, 생명을 살리는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단을 규정할 때는 보편 타당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윤리적 접근은 안 된다. 이단 규정은 철저히 교리에 따라야지 인간적인 친소관계에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고, 윤리의 잣대를 사용해서도 안 된다. 둘째, 교리 중에서도 구원에 직결되는 주요 교리에 근거해야지 사소한 교리적 차이를 확대적용해서는 안 된다. 핵심적 주요교리로 구원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성경과 계시론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객관적 증거에 입각하여야 한다. 증거 없이 주관적인 추론에 의거하여 이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단 문제에 접근하는 정신이 중요한데, 그것은 복음적인 정신이어야 한다. 복음은 살리는 것이다.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적 정신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살리는 복음의 정신을 따라 이단 문제를 해결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IV. 결어.

한국교회를 위한 바람직한 신학으로 온신학에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온신학의 신학정신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전체성(全), 오직 성경에 따라 바른 진리를 추구하는 중정성(正), 생명을 살리고 교회와 사회를 살리는 생명성(溫), 지성적 상위층만 이해할 수 있는 고난도의 신학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 하고 이해할 수 있는 평이성(易), 그리고 한국 교회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주체성(韓)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바른 교리는 16세기 교회개혁자들의 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바, 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때다. 이단과 사이비 종파운동이 교회를 흔들고 교란시키고 있는 지금, 더욱더 개혁원리를 찾아야 하겠다. 이단 사이비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특히 구원의 관건이 되는 구원론, 기독론, 삼위일체론, 성경론, 계시론에 입각하여 접근해야 한다. 그래서 명백한 이단임이 입증되면 단호히 척결함으로써 교회가 더 이상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인식하고 최대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사소한 잘못은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열정은 있으되 바른 교리를 몰라 옆길로 가고 있을 경우에는 바른 교리를 가르쳐서 주님의 몸인 참된 교회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길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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